카뮈, 페스트 줄거리 및 후기, 출판사 비교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습니다.
코로나로 이 책에 대한 열풍이 불었다가 잠잠해진 뒤에야 읽게 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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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이유?
카뮈의 페스트는 1946년 출간되어, 프랑스 역사상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소설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어판만 500만권. 전세계 판본까지 더하면 셀 수 없죠.
단순히 작품성 있는 고전이 아니라 대중소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흡사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잡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처럼 말이죠.
프랑스어 특유의 문체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지만, 한 번 빠져들면 쭉쭉 읽힙니다.
줄거리
프랑스 오랑 시에 근무하는 의사 리유의 시선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특징도 없는 해안 도시 오랑에서
어느 날 쥐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그렇게 쓰러지는 쥐들의 숫자가 점차 늘어나더니
급기야 사람도 비슷하게 온 몸의 관절이 붓고 종기가 나고 고열이 치솟다가 죽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페스트'의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 합니다.
과거 엄청난 사상자를 냈던 페스트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병으로 인한 사상자가 급증하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대책 마련을 위한 회의자리에서
페스트와 증상이 조금 다르므로 페스트인지 아닌지 신중하게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는 의사들도 등장합니다.
그러나 리유는, 페스트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페스트이든 아니든 치사율이 높은 이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선제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직언하고, 결국 오랑 시 전체에 대한 폐쇄명령이 내려집니다.
오랑 시 전체가 하나의 "감옥"이 된 것입니다.
애인, 배우자나 가족이 잠시 다른 도시로 떠났던 이들은 갑작스럽게 생이별을 하게 되고,
우연히 이 도시에 들렀던 사람들은 꼼짝없이 갇히게 됩니다. 생이별 아니면 귀향살이.
이후로는 마치 코로나처럼 페스트로 인한 사망자가 넘차 늘어나면서
일주일에 300명, 500명, 700명씩 죽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당국은 일주일에 1,000~2,000명씩 사망자가 나온다고 발표하는 대신
하루에 100~200명이 죽는다는 식으로 통계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차 죽음에 무감각해져서, 절도범이나 방화범을 총살하더라도 바닷물에 물 한 방울 떨어진 것 정도의 충격밖에는 주지 못하죠.
매장에 관한 묘사에서 페스트의 참상이 잘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국립묘지에 묻고 가족들에게 확인하고 애도할 시간을 잠시 부여합니다.
그러나 관도 묘지도 부족해지자 나중에는 묘지 담장을 허물고 그 공터에 깊은 구덩이를 두 개 판 뒤 남자, 여자 따로 따로 시신을 묻다가,
급기야 남/녀 구분도 없이 시체를 포대기로 묻고 그 위에 흙과 석회를 뿌리고, 결국은 화장터까지 긴급철길을 연결하여 시신들을 불태웁니다.
시신을 태운 연기가 도시에 몰려들자 시민들이 그 연기에 페스트균이 있을까 항의하여 연기를 다른 쪽으로 돌리는 작업도 합니다.
이런 비극 속에 작품 속 등장인물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대응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우연히 이 도시에 취재를 하러 들어왔다가 폐쇄로 갇히게 된 랑베르.
그는 외부에 있는 연인과 생이별하게 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리 저리 로비를 하며 도시를 빠져나가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은 이 도시의 일원이 아니고 페스트는 본인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그를 굳이 분류하자면 ‘회피형’ 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다른 도시에 우연히 갔다가 갇혀서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빠져나가려고 시도를 하지 않을까요?
두 번째는 파늘루 라는 가톨릭 신부입니다. 파늘루는 페스트가 신의 분노이며 따라서 우리들로서는 겸허하게 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설교합니다.
마지막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리유. 그는 페스트가 신의 뜻이든 아니든 이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데 전념합니다.
어떤 영웅주의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이 재난에 대하여 결코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맡은 바 직분을 수행하면서
전염병의 확산을 방지하고 한 명의 환자라도 살리는 데 전념합니다.
오통이라는 판사의 아들이 코로나로 고통스럽게 죽는 작면을 목도하고, 파늘루 신부에게 어린아이의 주리를 트는 것이 신이 원하는 세상이라면 그러한 세상은 죽음으로서라도 거부하겠다고 말하는 모습에 그의 페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드러납니다.
마지막 부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장 타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검사인 아버지가 사형을 집행하는 장면을 보고
우리 모두가 페스트를 갖고 있고 이를 남에게 전염시킬 수 있으며, 따라서 남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결코 헤이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리유와 함께 보건대를 조직하고 페스트에 반항 합니다.
소설이 막바지에 이르면 이 세 유형의 인간상은 결국 반항하는 인간인 리유로 통합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랑베르는 도시를 탈출할 수 있게 된 바로 전날, 이를 포기하고 리유와 함께 페스트에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파늘루 신부는 어린 아이의 죽음을 보고 충격에 빠지면서 약간의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고, 마찬가지로 페스트 전쟁에 함께합니다.
그러다가 페스트는 마치 신경쇠약에 걸린 것처럼 진정됩니다. 시청 서기 그랑이라는 인물도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그랑이 페스트에 걸려 쓰러져
죽을 것 같다가 갑자기 증세가 호전되고, 다른 환자들도 마찬가지.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리유와 함께 싸웠던 장 타루는 결국 막바지에 페스트로 사망하고, 리유는 큰 슬픔에 빠집니다.
이후 폐쇄됐던 시 경계의 문이 열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재화합니다. 랑베르 역시 애인과 재회.
다만 또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열차를 타고 들어와 그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눈물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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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 페스트를 조금 새롭게 읽는 법
이 소설은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집필되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사람들을 감옥 속 수형자들로 만들었던 페스트는
사실 2차 세계대전에 대한 비유로 읽을 수 있습니다. 소설 속 많은 묘사들에서 페스트를 2차 세계대전으로 바꾸어놓고 읽으면
실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사상자가 나오고 가족들과 생이별하며 그 가운데 혼란스러운 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전후 이 소설이 많은 인기를 끌었던 것 역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마주한 여러 인간 군상의 모습과
그 가운데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는 인간상에 대한 묘사가 사람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카뮈의 소설세계에서는 “부조리”라는 개념이 많이 쓰이는데, 이 페스트나 2차 세계대전을 “부조리”로 바꿔놓고 읽으면
보다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에 닥치는 불행들은 어떤 원인이나 이유가 있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겪는 그런 부조리 앞에서 회피하는 인간, 신의 이름 아래 수용하는 인간, 그리고 리유처럼 끝까지 반항하는 인간
세 가지 길이 있다면 과연 우리는 그 동안 어떤 자세로 살아왔는가, 앞으로는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본다면 비록 2차 세계대전 직후는 아니지만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고민할 지점이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가 터져서 페스트라는 책이 인기가 있어졌지만 (실제로 이 책에 등장하는 여러 모습들, 예컨대 처음에는 부정하고 회의히고, 점점 무감각해지고, 그 와중에 누군가는 성실하게 싸우고, 누군가는 무관심하고, 누군가는 페스트로 이득을 얻고, 생이별에 슬퍼하고, 일부는 사치하고, 페스트가 끝나자 조심스럽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려는 모습들은 코로나 이후의 상황과 매우 흡사합니다),
코로나가 종식된 이후 세상에서도 이 책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많은 이야깃거리를 던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도 널리 익히고, 이른바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이겠죠.
출판사 비교
저는 민음사 본으로 읽었고, 읽다가 열린책들, 그리고 문예출판사 버전도 전자책으로 잠시 보았는데 번역이 서로 많이 다릅니다.
기본적으로 알베르 카뮈의 문체가 시적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어려운 것 같은데요. 일장 일단이 있는 것 같고 각자에게 맞는 번역본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민음사 버전은 제가 느끼기에 시적인 운율감을 살리면서 술술 읽히도록 번역이 되었으나
그렇기 때문에 곳곳에서 무슨 의미인지 조금 파악이 어려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열린책들 버전은 조금 더 현대적인 방식으로 번역을 해서 그 의미가 민음사본보다 잘 전달이 되는 것 같고요.
다만 운율감은 조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문예출판사 버전은 민음사보다 열린책들 버전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보통 민음사나 열린책들 가운데 하나를 많이 보시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민음사 버전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읽기 쉬운 책은 아닌데 의미가 일부 모호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운율감 있게 쭉쭉 읽어나가면
어느새 각 인물상이 생생하게 살아나 말을 거는 듯한 순간이 오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