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은 좋은 할아버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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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님의 독부 이승만 평전이라는 책을 읽었다.
이명박 정부 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을 부풀리려는 뉴라이트 사학자들 및 언론의 움직임이 일자, 이승만의 실체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쓴 책.
하지만 이승만의 과 뿐만이 아니라 공 역시도 은폐하지 않고 서술하고 있다. 공과 과를 3:7 정도로 본다고.
1875년생인 이승만은 과거시험에 도전하다가 당시 매관매직이 성행하여 낙방하고, 배재학당에 들어가 미국 선교사들로부터 근대화된 교육을 받는다. 매우 총명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국식 민주주의 체제에 깊은 감명을 받아 고종 대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보려는 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투옥되고, 6년 간 감옥생활을 한다. 감옥에서 나온 뒤 세상은 일본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에 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지만 실패,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미국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석사 및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애당초 미국으로 떠날 때부터 선교사들의 추천장을 19장 들고 갔고, 현지에서도 선교사 등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기에
한국 유학생이 짧은 기간 안에 박사학위까지 마칠 수 있었다.
그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던 동안 한국, 상해 등에서는 치열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고, 3.1. 만세운동 이후 국내 및 상해에 수립된 여러 임시정부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국이 중요하다고 판단, 미국과 관계가 가장 가까웠던 이승만을 대통령 내지 국무총리로 추대한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와이에 터를 잡고 신문 출판 활동 등을 했을 뿐 국내 독립운동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고,
식민지 근대화론과 비슷한 주장을 펼치며 심지어 하와이 주재 일본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에게서 반일 의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에 잠시 들르는데, 이승만에 모습에 실망한 이들과 갈등을 겪고 다시 하와이로 돌아와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 과정에서 박용만 등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는 이들과의 헤게모니 다툼 등이 끊이지 않았고, 미주 한인사회 내의 분열은 이후 UN총회 한국 참석을 좌절케 하는 등 여러 부정적 영향을 주었다.
물론 미일전쟁이 시작된 이후로는 일제가 패망할 것을 알고 임정 승인 등을 위해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으나 별다른 성과는 얻지 못했고, 그러다 일본이 항복하자 국내 주도권을 잡기 위해 김구보다 먼저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로비를 벌이고, 결국 맥아더 및 하지 중장과 면담을 하며 미군복을 입고 한국에 귀국하는 데 성공한다.
맥아더에게 반소 반공 편지를 보내 맥아더가 이승만을 좋게 보았다고.
그러나 이승만은 거의 미국 사람. 한국어가 어눌하고 외국 억양으로 이승만에게 통역이 필요할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시간 동안 미국에서 평온한 나날을 보낸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것이 아이러니.
이승만은 국내 자신의 지지기반이 없었기에 친일 부일 출신들이 주축이 된 한민당으로부터 여러 경제적 원조를 받고 이들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반민특위, 즉 친일파 청산 작업을 대놓고 방해하여 무위로 만든다. 해방이 되었는데 친일파 경찰들이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는 역사의 아이러니. 개인적으로 이승만의 가장 큰 과라고 생각한다.
이후 한국 전후 처리에 있어 신탁 논쟁이 벌어졌을 때 신탁통치 반대를 주장했고, 소련이 38선 이북을, 미군이 38선 이남을 점령하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정부 수립에 난항을 겪자 38선 이남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창한다. 그리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 1948년의 일이다.
해방정국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지도자로 여운형이나 김구 등이 인기가 많았는데 여운형은 피살당했고, 김구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대통령 직에 도전하지도 않았으므로 이승만이 당선될 수밖에 없던 상황.
김구는 남과 북에 서로 다른 정부가 건립되면 결국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이를 강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이렇게 조용히 살고 있는 때에 이승만 측 인사들에 의해 암살당한다(김구 암살범인 안대희는 6.25 전쟁 당시 풀려나 심지어 특진까지 하고 이후 군납업체를 운영, 잘 살다가 4.19 혁명 이후 도망치며 살다가 90년대 버스기사에 의해 살해당함. 김구 암살 관련하여 이승만이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관련자들의 진술이 찾아보면 많이 있다).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
이승만은 이처럼 남북 평화통일을 주장하는 세력들을 반공으로 몰아 처단하고, 북진 통일을 주장했는데,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북한이 전쟁을 개시했는데, 6월 24일에 국군회관? 건립 행사로 참모총장을 비롯 대부분 군장성들이 밤늦게 새벽까지 회식을 하고 술에 취해 있었고 사병들도 상당수 휴가를 가 있었다. 이런 틈에 전쟁이 나 며칠만에 서울을 함락당한다.
이승만은 서울이 함락되기 직전 몰래 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갔고, 그럼에도 남한이 잘 싸우고 있으니 자리를 지키라는 녹화방송을 틀었다. 혼자만 도망가면서 남은 주민들을 방패막이처럼 쓴 셈. 그러면서 혼자 부산까지 도망가 일본 망명정부 수립을 미국에 건의한다. 더욱 가관은 이승만이 도망간 뒤 당시 유일한 한강다리를 폭파하여 당시 한강다리를 통해 피난을 떠나던 수천 명이 사망한 것.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신의주로 도망갔고 이승만은 부산으로 도망갔다.
이후 전쟁이 끝나가는데 이승만은 나홀로 휴전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북진을 외쳤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국으로 가서 의회에서 먼저 소련 중국 북한을 침공하자고 주장한다. 남한 병사들이 대신 싸울 것이고 미국인의 피는 흘릴 필요가 없다면서.
이는 이승만의 국내 정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한 것. 그는 정말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국민들은 점점 이승만의 본모습을 보기 시작하고, 이후 몇 차례 국회의원 및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떨어질 위기에 처하는데 그 때마다 부정선거 및 폭력을 동원하여 무산시킨다.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사사오입개헌을 진행하고,
국회프락치 사건으로 국회의원들을 겁박하고,
선거 때는 부정선거를 자행한다.
이후 이승만은 유력한 라이벌이었던 조봉암에 대하여 사법살인을 저지르기까지 한다.
그러다가 1960년 3월 15일 부정선거에 보다못한 학생들의 주도로 시위가 일어나고 4월 19일 시위가 격해지면서
미국마저 이승만의 등을 돌리자 이승만은 하야를 선언. 한 달이 지나 하와이로 망명한 뒤 5년 정도 더 살다가 죽었다.
이승만이라는 대통령의 공이 무엇인가? 이 책의 저자는 공을 3, 과를 7이라고 했는데 내가 느끼기에 공보다 과가 더 큰 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이 독립한 것은 이승만의 대미외교 때문이 아니라 미국의 원자폭탄 때문이었고,
오히려 윤봉길 의사 등의 암살 사건 등으로 중국이 한국 임정을 지원하면서, 김구의 요청으로 중국이 건의하여 전후 한국이 적정한 시기 자유국가로 독립한다는 카이로선언을 이끌어냈다. 이는 어설픈 아마추어 외교의 성과가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들의 공이었다.
이후 청산되어야 할 친일파들은 이승만을 등에 엎고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에서 많은 경제적 정치적 권력을 갖고 살아간다.
게다가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한 김구, 조봉암 등 많은 위인들을 이승만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 확보를 위해 죽였고,
부정선거를 대놓고 자행했으며(투표 개시 시각 이전 투표함에 유권자 40%에 달하는 부정투표용지를 넣는 등 대담),
의회 통과가 어려우면 국회프락치 사건 등 사건을 조작하여 잡아가는 등 공포 분위기를 형성했고,
당시 미국의 원조물자 등은 로비를 한 일부 특권세력(대부분 친일)에게 나누어주었고,
무엇보다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수많은 죄없는 어린 학생, 시민들을 죽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이 목숨을 걸고 몰아낸 대통령이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